끝없는 밤
이전에 읽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끝없는 밤]. 그도 그럴 것이 본격적인 사건은 이야기의 중후반부에 등장하여 결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빨리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부에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증거와 증언을 분석하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이야기 내내 집시의 땅 이라는 저주를 둘러싼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면서 전반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건이 아닌 그러한 분위기와 연계하여 인간 내면의 갈등과 욕망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 [끝없는 밤]은 확실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 독특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마이클 로저스는 다양한 일을 하면서 현재를 즐기는 청년이다. 주위에서 부자들과 함께 일을 하지만, 부를 얻기 위한 그들의 끔찍한 모습을 혐오하면서 그는 커다란 욕망 또는 포부를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건축가 산토닉스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가 자신을 위해 멋진 저택을 지어주었으면 하는 꿈을 가질 뿐이었다. 물론 그 꿈 역시 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로저스에게 운명의 만남이 다가오는데, 그것은 바로 집시의 땅 이라 명명되던 타워스 라는 낡은 저택 근처에서의 엘리와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첫만남이었지만, 이내 둘은 낡은 저택에 대한 경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비록 어렴풋이 그녀가 자신과는 달리 부잣집 가문의 딸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마이클은 엘리와 함께 집시의 땅 에서 새로운 집을 짓고 살기 위한 꿈을 꾸면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놀랍게도 엘리는 그러한 마이클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이 작품은 마이클 로저스의 시선에 의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후 로저스가 알게 된 사실은 독자에게도 놀라움으로 다가오게 된다. 엘리가 21살이 되어 엄청난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한 상태였고, 심지어 타워스 경매에도 참여하여 그곳을 매입하게 된 것이었다. 더불어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서 마이클과의 결혼을 통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계획하게 된다. 사실 이들의 결합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우연한 만남은 그렇다하더라도 둘의 차이가 극명함에도 불구하고 엘리는 주저하지 않고, 마이클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시선이 다소 속물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러한 시선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갈등의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우선 엘리의 친척들과 그녀의 재산을 관리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마이클은 불편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어머니는 물론 그를 유일하게 이해해준다고 생각했던 산토닉스 역시 불안한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게 된다. 구트먼 양, 아가씨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야.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만큼 항상 원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지. 하지만 마이크는 길을 잃을 수도 있어. 아직은 철이 덜 들어서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잘 모르거든. - p. 85 中에서 -
이 작품은 1967년에 발표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73번째 소설이자 61번째 장편으로, 작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라고 고백한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크리스티 작품 세계 말년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으며 또한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이 인정한 국내 유일의 공식 완역본이어서 기존 번역서의 누락와 역을 수정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인 끝없는 밤 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예언 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시는 작품에 음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해주는 동시에 끝없는 밤의 운명 과 기쁨의 운명 , 그리고 불행의 운명 이라는 시구를 통해 작품의 세 주인공 마이클, 엘리, 그레타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다른 작품보다 심리적인 면이 많이 강조된 이 작품은 운명의 갈림길에서 사악한 본능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행복을 향해 열린 문을 닫고 암흑 속에 자신을 가둔 주인공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하는 작품이다.
정식 한국어 판 출간에 부쳐
제1장
제2장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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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