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착취를 통한 조국 근대화. 이 개념들은 어쩌면 우리 민족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상체계이다. 오히려 우리의 역사책은 이 개념들을 무기로 들고 다니던 자들에 의하여 짓밟혔던 기록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DNA들을 단 한 번도 혈관 속에 품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종의 문헌들을 읽어봤자 머리로는 알 수 있지만 마음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알고 싶은지도 모른다. 정진국의 「제국과 낭만」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19세기 열강들의 근대사를 되돌아보며 가학적 성장과 부의 축적,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낭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고찰한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가장 명백한 시각적 흔적인 미술 작품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어낸다. 아마 저자는 제국주의 수탈사의 다양한 단면들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는 동시에 당대의 미술 작품을 토대로 시대의 정서와 감성까지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그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싶다. 일단은 사족이 많다. 감정적인 의문사와 감탄사가 많다. 이 책을 정통 역사서로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등장하는 감정적 서술들은 독자의 지적 몰입을 방해한다. 심지어 해당 사태를 바라보는 저자의 감정을 노출하는데서 더 나아가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최근(저자가 한창 열심히 저술했을 2016년 말)의 국내 정치 상황에 빗대어 꼬집는다. 이런 문장이 최소 10여개는 등장하는 것 같다.저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 책이 독자의 서고에서 장기적으로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는 문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처럼 동시대적 감각에 집중적으로 소구하는 서술을 자제해야 했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가 최근 우리 국민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준 사건은 맞지만, 그 사태에 관한 역사적 무게감은 현재의 우리가 차마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재의 국내 정치상황을 빗대어 과거를 되돌아보는 기술은 시사주간지 특집기사나 정치평론가의 논평 정도면 족하다. 최소한 내 서고에 두고두고 꽂혀 있을 역사책이라면, 이렇게 단기적인 시각으로 비교분석하는 문장은 없었으면 한다. 19세기 제국주의와 관련하여 너무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을 스치듯이 지나쳐 버리는 것도 문제다. 요컨데 산만하다. A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해서, 아, 이 챕터는 이 사람에 관한 에피소드구나 싶으면 돌연 B를 이야기하고, 순식간에 B의 사촌이라며 C를 논하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해당 장의 핵심 인물은 C였던 것이다. 이쯤되면 A는 논의의 서막을 이끌어내는 존재로 인정해 줄만 하지만, B는 왜 등장한 것인지 모르게 된다. B가 불필요하게 궁금해진다. 이런 식으로 주제에 크게 연관되지 않은 인물들이 스쳐지나가 듯 언급되는데, 저자가 그저 자신의 역사 상식을 드러내고 싶어서 언급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장별로 에피소드를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아무런 결론도 도출하지 않고 끝내버리는 것도 산만함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다. 역사서가 아니라서 그냥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나열한 것이 애초에 의도한 바라고 하더라도 굳이 장을 구분해 놓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과 비판을 전개했다면 장별로 하나라도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글을 마쳤어야 한다. 그림의 역할은 애매하다. 그림에서 우리가 읽지 못하는 메시지나 새롭게 일깨워주는 사실들이 거의 없다. 저자는 역사와 그림을 함께 다루는 책을 기획했는데, 무게 중심 자체는 역사에 좀 더 치우쳐있다(마케팅은 그림 쪽으로 치우친 것 같지만). 그래서 이 책에서 명화들은 그저 역사책 속의 삽화역할을 맡는 것 같다. 끝으로, 인용문이 과도하게 길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다양한 역사가 및 철학자의 관점이 궁금할 수 있고, 때론 유용하기도 하겠지만, 너무 길어지면 관점이 산만해진다. 인용문이 어떤 의도로 삽입된 것인지 의구심만 자아낸다. 3페이지 정도를 차지하는 인용문도 있는데, 귀한 문헌인 것은 알겠으나 그 문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의미있으며 우리가 곱씹어 봐야 하는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사상을 배우라는 것인지, 실제적 사실을 배우라는 것인지 헛갈린다. 저자는 맺음말에 귀한 원문을 찾아 직접 번역해 실었다며 독자의 칭찬을 요청하고 있는데,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격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국과 낭만」은 그림 속 숨은 비밀을 파해쳐서 지적 만족감을 주는 책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통시적/공시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그림의 감성으로 보충해주는 책도 아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지점 어딘가에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 귀한 소재가 참 아깝다.
명화와 그것을 통해 보는 19세기 단면사(短面史)를 다룬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시대의 일면을 뚫어지게 보기도 하고, 당대의 작품을 파고들려는 미술사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저자의 시선은 19세기의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단숨에 훑는다. 독자들은 제국주의 정치, 경제체제로 전환되는 유럽과 그들의 수탈이 자행되던 식민지를 화가의 그림을 따라 종횡무진 누비게 된다. 그 속에서 독자들은 경쾌하고 날렵하게 시간을 압축하고 삶과 정치라는 역사의 단면에 마주서게 된다.저자는 굳이 당대의 미술 사조를 논하려고 하지 않는다. 화가론이나 화풍, 상징 같은 허다한 ‘미술 지식’을 시시콜콜 늘어놓지도 않는다. 저자의 언어는 직설이며, 그림은 베일을 일찌감치 걷어 올려놓았다. 저자가 다루는 그림과 그림 속의 역사는 오늘과 무관하지 않다. 화가는 정치와 경제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시대의 역사를 그려 냈을까. 제국과 낭만이 쏘아주는 ‘레이저 포인트’의 초점이 멈추는 곳, 그곳에서 동시적으로 ‘오늘’을 볼 수 있다. 낯선 그림과 이국의 역사는 절묘하게 마주쳐 독자를 인도해 나간다.
책머리에 4
Chapter 1 나폴레옹 제국의 여파
제국의 서막 12
나폴레옹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스페인 원정과 맘루크족 31
1808년 5월 2일의 마드리드 프란시스코 고야
스핑크스의 얼굴 41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 레옹 코니에
대륙의 문이 열릴 때 59
광저우의 상관(商館) 윌리엄 대니얼
사하라의 영웅 압델카데르 77
즈말레 전투 호라스 베르네
Chapter 2 유럽의 봄, 오리엔트의 가을
비더마이어 시대 94
초병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
오토만제국의 몰락 116
이즈미르 순찰대 알렉상드르 가브리엘 드캉
이상한 향기의 협주곡 139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카리브 해의 사탕수수밭 154
생 도맹그 종려수 고지전 장비에 수코돌스키
사하라 열풍의 수수께끼 175
마담 무아테시에 도미니크 앵그르
Chapter 3 텅 빈 무대, 사하라의 비밀
영광 속의 마지막 항해 194
퇴역 전함 테메레르 윌리엄 터너
루브르와 외제니 황후 208
루브르 박물관의 탄생, 설계안을 보고받는 황제 내외 앙주 티시에
이슬람 영웅 압델카데르 229
1860년 다마스쿠스 기독교도를 구하는 압델카데르 장바티스트 위스망스
인도차이나의 식민화 243
1840년 12월 8일 셰르부르 앞바다에 도착한 나폴레옹 1세 유해 레옹 모렐 파티오
아프가니스탄과 영국의 승부 256
패잔병 엘리자베스 톰슨
Chapter 4 서세동점의 일화
이민 권장 268
영국이여 안녕! 포드 매덕스 브라운
사라진 낙원 281
인도차이나 탐사 루이 들라포르트
미녀 첩자 카스틸료네 백작부인 297
카스틸료네 백작부인 미켈레 고르디자니
아프리카 분할 309
베르사유 궁의 독일제국 선포식 안톤 폰 베르너
최후의 낭만군주 루드비히 2세 329
노이슈반슈타인 성 포토크롬. 작자 미상
글을 마치며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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